빌 니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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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 니콜슨은 1919년에 태어나 1955년 선수 은퇴 후 토트넘 홋스퍼의 코치로 시작하여 1958년부터 1974년까지 감독으로 활동한 영국의 축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선수 시절에는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한 경기에 출전했으며, 감독으로서 토트넘 홋스퍼를 1960-61 시즌 더블 우승으로 이끌었고, FA컵 3회, 리그컵 2회, UEFA 컵 위너스 컵, UEFA컵 우승을 달성하며 토트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대를 열었다. 1975년 대영 제국 훈장을 받았으며, 2003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74년 감독직에서 사임한 후 200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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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니콜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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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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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윌리엄 에드워드 니콜슨 |
출생일 | 1919년 1월 26일 |
출생지 | 스카버러, 노스라이딩오브요크셔, 잉글랜드 |
사망일 | 2004년 10월 23일 |
사망지 | 하트퍼드셔, 잉글랜드 |
기사 작위 약칭 | OBE |
포지션 | 윙하프 |
유소년 경력 | |
유소년 클럽 1 | 영 리버럴스 |
유소년 클럽 2 | 스카버러 노동자 클럽 |
유소년 클럽 3 | 토트넘 홋스퍼 (1936–1938) |
선수 경력 | |
클럽 1 | 노스플리트 유나이티드 (1938) |
클럽 2 | 토트넘 홋스퍼 (1938–1955) |
출장 2 | 314 |
득점 2 | 6 |
국가대표 경력 | |
국가대표팀 | 잉글랜드 (1951) |
국가대표 출장 | 1 |
국가대표 득점 | 1 |
감독 경력 | |
클럽 1 | 토트넘 홋스퍼 (1958–1974) |
2. 선수 경력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니콜슨은 더럼 경보병 연대에 입대했다. 프로 축구 선수였기 때문에 체육 코스를 이수하고 하사관 교관이 되어 전쟁 기간 동안 신병들을 훈련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그는 여러 클럽에서 객원 선수로 뛰었는데, 그중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19번 출전했다.[4] 그는 전쟁으로 인해 선수 경력의 절반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 경험을 후회하지 않았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나중에 그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칠 인적 관리 기술을 익혔기 때문이다.[5]
1946년 니콜슨은 토트넘 1군으로 복귀하여 두 시즌 동안 센터 하프로 뛰었고, 이후 6년 동안 라이트 하프로 활약했다. 그는 1950-51 시즌에 리그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전설적인 토트넘의 "푸시 앤 런" 팀의 핵심 선수였다.[6]
1951년 5월 19일, 구디슨 파크에서 열린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잉글랜드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으며, 경기 시작 19초 만에 첫 볼 터치로 득점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5] 그러나 부상, 소속팀 우선주의, 빌리 라이트의 뛰어난 기량 때문에 더 이상 대표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5] 니콜슨은 "내 의무는 토트넘을 위해 몸을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내 월급을 주는 거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는 유일한 대표팀 출전 경기에 대해 "스탠 피어슨이 공을 뒤로 넘겨줬고, 나는 달려가서 첫 터치로 슛을 날렸는데, 공을 차는 순간 골이 들어갈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음 경기에서 그들은 빌리 라이트를 다시 기용했고, 그가 더 나은 선수였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이처럼 니콜슨은 A매치 데뷔전에서 첫 볼 터치로 득점하고도 이후 A매치에 출전하지 못한 유일한 선수로 기록되었다.[5]
2. 1. 초기 생애 및 토트넘 입단
노스요크셔 스카버러에서 9명의 자녀 중 여덟째로 태어난 니콜슨은 글래드스톤 로드 주니어 스쿨을 다닌 후 스카버러 고등학교에 다녔다.[1] 학교를 졸업한 후 잠시 세탁소에서 일했지만, 17세에 토트넘 홋스퍼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유소년 시절 영 리버럴스와 스카버러 워킹 멘스 클럽에서 뛰었고, 1936년 3월 16일에 토트넘에 합류했다.[2] 한 달간의 테스트 후 주급 2GBP를 받으며 그라운드 스태프 소년으로 채용되었다.[3] 스퍼스의 유소년 클럽 노스플리트 유나이티드에서 뛰었고, 도버와의 결승전에서 켄트 시니어 컵 우승 메달을 획득했다.[2] 1938년 8월 토트넘과 정식 프로 계약을 체결했고, 1938년 10월 22일 이우드 파크에서 블랙번 로버스를 상대로 첫 번째 풋볼 리그 경기에 출전했다.[2]2. 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니콜슨은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더럼 경보병 연대에 입대했다. 그는 프로 축구 선수였기 때문에 체육 코스를 이수하고 하사관 교관이 되어 전쟁 기간 동안 신병들을 훈련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그는 여러 클럽에서 객원 선수로 뛰었는데, 그중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19번 출전했다.[4] 그는 전쟁으로 인해 선수 경력의 절반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 경험을 후회하지 않았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나중에 그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칠 인적 관리 기술을 익혔기 때문이다.[5]2. 3. 토트넘 복귀와 전성기
니콜슨은 1946년 토트넘 1군으로 복귀하여 두 시즌 동안 센터 하프로 뛰었고, 이후 6년 동안 라이트 하프로 활약했다. 아서 로 감독 취임 후, 토트넘은 1949-50 시즌 2부 리그에서 우승하여 1부 리그로 승격했고, 1950-51 시즌에는 1부 리그 첫 우승을 달성했는데, 이때 니콜슨은 "푸시 앤 런" 스타일로 유명했던 토트넘의 핵심 선수였다.[6][18]1951년 5월 19일, 니콜슨은 구디슨 파크에서 열린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잉글랜드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경기 시작 19초 만에 첫 볼 터치로 득점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5] 그러나 부상, 소속팀 우선주의, 빌리 라이트의 뛰어난 기량 때문에 더 이상 대표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5] 니콜슨은 "내 의무는 토트넘을 위해 몸을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내 월급을 주는 거잖아요?"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일한 대표팀 출전 경기에 대해 "스탠 피어슨이 공을 뒤로 넘겨줬고, 나는 달려가서 첫 터치로 슛을 날렸는데, 공을 차는 순간 골이 들어갈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음 경기에서 그들은 빌리 라이트를 다시 기용했고, 그가 더 나은 선수였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이처럼 니콜슨은 A매치 데뷔전에서 첫 볼 터치로 득점하고도 이후 A매치에 출전하지 못한 유일한 선수로 기록되었다.[5]
2. 4. 국가대표 경력
빌 니콜슨은 1951년 5월 19일 구디슨 파크에서 열린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잉글랜드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경기 시작 19초 만에 첫 볼 터치로 득점하는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5][19] 그러나 부상, 소속팀 토트넘을 우선시하는 경향, 그리고 빌리 라이트의 뛰어난 기량 때문에 더 이상 국가대표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5]니콜슨은 "내 의무는 토트넘을 위해 몸을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내 월급을 주는 거잖아요?"라고 말하며 소속팀에 대한 헌신을 드러냈다. 그는 유일한 국가대표 경기 출전에 대해 "스탠 피어슨이 공을 뒤로 넘겨줬고, 나는 달려가서 첫 터치로 슛을 날렸는데, 공을 차는 순간 골이 들어갈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음 경기에서 그들은 빌리 라이트를 다시 기용했고, 그가 더 나은 선수였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국제 경기에서 첫 번째 볼 터치로 득점한 유일한 선수로 기록되었지만, 이후 다시는 국가대표팀에서 뛰지 못했다.[5]
1950년에는 잉글랜드 대표팀에 처음으로 소집되어 1950년 FIFA 월드컵 선수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다.
3. 감독 경력
빌 니콜슨은 1958년부터 1974년까지 토트넘 홋스퍼 감독을 맡아 팀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기를 이끌었다.
1960-61 시즌, 토트넘은 리그 개막 후 11연승을 달리며 4월 17일 셰필드 웬즈데이 FC를 꺾고 리그 우승을 확정했다. 바비 스미스, 레스 알렌 등 공격진 활약으로 42경기 115골을 기록, FA컵 결승에서도 레스터 시티 FC를 2-0으로 제압하며 더블을 달성했다.[20] 이는 20세기 최초의 더블이었다.
1961-62 시즌, 지미 그리브스 활약으로 FA컵 2연패를 달성했으나, UEFA 챔피언스컵 준결승에서 SL 벤피카에 패했다. 1962-63 시즌 UEFA 컵 위너스 컵 결승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꺾고 잉글랜드 클럽 최초 유럽 대항전 우승을 이뤘다.[20]
1964년 이후 주축 선수 은퇴, 존 화이트 사망 등 악재 속에서도 팻 제닝스, 테리 베너블스 등 영입, 팀 재건에 성공했다. 1966-67 시즌 리그 3위, FA컵 결승에서 첼시 FC를 꺾고 우승했다.[18]
이후 스티브 페리먼, 마틴 치버스 등 영입, 1970-71 시즌 리그 3위, 풋볼 리그 컵 결승에서 애스턴 빌라 FC를 2-0으로 꺾고 우승했다. 1971-72 시즌 UEFA컵 결승에서 울버햄튼 원더러스 FC를 꺾고 잉글랜드 최초 두 개 유럽 대항전 우승 클럽이 되었다.
1972-73 시즌 풋볼 리그 컵 재우승, 1973-74 시즌 UEFA컵 결승 진출했으나 페예노르트에 패했다. 경기 후 토트넘 훌리건 폭동은 니콜슨 감독 사임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8]
1970년대 선수 임금 인상, 훌리건 문제 심화에 환멸을 느낀 니콜슨은 1974-75 시즌 초반 부진, 리그컵 4-0 패배 후 16년 감독 생활을 마감했다.[11]
3. 1. 토트넘 감독 부임 초기
니콜슨은 선수 은퇴 후 잉글랜드 축구 협회(FA) 코칭 코스를 수료하고 토트넘의 코칭 스태프에 합류했다. 빠르게 승진하여 1955년에는 1군 코치가 되었고, 1958년 FIFA 월드컵에서는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월터 윈터보텀을 보좌했다.[5]1958년 10월 11일, 니콜슨은 토트넘 이사회에 소환되어 지미 앤더슨의 후임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클럽은 1부 리그에서 하위 6위에 머물고 있었다. 니콜슨 감독 부임 후 첫 경기에서 토트넘 홋스퍼는 에버턴을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10-4로 크게 이겼다.[8] 이는 1959–60 시즌 크루 알렉산드라를 상대로 FA컵 재경기에서 13-2(전반 10-1)로 승리한 것을 제외하면 클럽의 새로운 기록이었다.[9]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스퍼스는 1960–61 시즌에 풋볼 리그 챔피언십과 FA컵에서 우승하여, 20세기 첫 번째 "더블"을 달성하였다. 스퍼스는 첫 11경기에서 승리하고 42경기에서 115골을 기록하는 등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였다. 이듬해 그들은 다시 FA컵에서 우승했고, 1961–62 유러피언컵 준결승에서 벤피카에 아쉽게 패했다.
1962–63 시즌, 니콜슨은 스퍼스를 이끌고 유럽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하며, 주요 유럽 트로피에서 우승한 최초의 영국 클럽이 되었다. 로테르담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스퍼스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5-1로 꺾었다.
3. 2. 1960년대: 더블과 유럽 제패
니콜슨은 잉글랜드 축구 협회(FA) 코칭 코스를 수료하고 선수 은퇴 후 토트넘의 코칭 스태프에 합류하여, 1955년에 1군 코치가 되었다. 1958년 10월 11일, 토트넘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클럽은 1부 리그에서 하위 6위에 머물렀으나, 니콜슨 감독 부임 이후 에버턴과의 첫 경기에서 10-4로 대승을 거두었다.[8] 이는 1959–60 시즌 크루 알렉산드라를 상대로 FA컵 재경기에서 13-2로 승리한 것을 제외하면 클럽 최고 기록이었다.[9]1960–61 시즌, 스퍼스는 첫 11경기에서 승리하고 42경기에서 115골을 기록하며 풋볼 리그 챔피언십과 FA컵에서 우승하여, 20세기의 첫 번째 "더블"을 달성했다.[20] 이듬해 FA컵에서 다시 우승했고, 1961–62 유러피언컵 준결승에서 벤피카에 패했다.
1962–63 시즌, 스퍼스는 유럽 컵 위너스 컵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5-1로 꺾고 우승하여, 유럽 주요 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영국 클럽이 되었다.[20]
1966–67 시즌, 니콜슨의 스퍼스는 첼시를 꺾고 7년 만에 세 번째 FA컵을 차지했다.
3. 3.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변화와 도전
1962-63 시즌에 니콜슨은 스퍼스를 다시 역사에 기록했는데, 그들은 주요 유럽 트로피에서 우승한 최초의 영국 클럽이 되었다. 1963년 5월 15일, 스퍼스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5-1로 꺾고 UEFA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했다.[20]1966-67 시즌에 니콜슨의 스퍼스는 런던 클럽 간의 최초의 결승전에서 첼시를 꺾고 7년 만에 세 번째 FA컵을 차지했다. 이어서 1970년대 초반에 일련의 트로피를 획득했는데, 풋볼 리그 컵은 1970-71년과 1972-73년에, UEFA컵은 1971-72년에 우승했다.
1964년 이후, 더블을 달성한 주력 멤버인 바비 스미스, 레스 알렌, 대니 블란치플라워 등은 나이와 부상으로 인해 잇따라 토트넘을 떠났다. 존 화이트가 골프장에서 벼락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도 일어났다. 니콜슨은 새로운 전력인 팻 제닝스나 테리 베너블스 등을 보강하여 팀 재건을 꾀했고, 1966-67 시즌에 리그 3위로 시즌을 마치고, FA컵에서는 결승에서 첼시 FC를 꺾고, 당시 잉글랜드 최다인 5번째 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스티브 페리먼과 마틴 치버스 등을 더한 팀은 1970-71 시즌에 리그에서 3위의 성적을 거두었고, 풋볼 리그 컵에서는 결승에서 애스턴 빌라 FC를 상대로 치버스가 2골을 넣어 2-0으로 첫 우승을 차지했다.
1971-72 시즌에는 처음 개최된 UEFA컵에 출전했다. 준결승에서 AC 밀란을 꺾고 결승에서는 같은 잉글랜드의 울버햄튼 원더러스 FC를 2경기 합계 3-2로 꺾고 첫 우승을 차지했다. 토트넘은 잉글랜드 최초로 2개의 서로 다른 유럽의 국제 대회를 제패한 클럽이 되었다.
1972-73 시즌에는 2년 만에 2번째 풋볼 리그 컵 타이틀을 획득했다. 리그 컵 타이틀을 여러 번 획득한 최초의 클럽이었다.
1973-74 시즌에는 2년 만에 UEFA컵에 출전하여 결승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결승에서 페예노르트에 패해 우승을 놓쳤다. 이 패배로 토트넘의 훌리건에 의한 폭동이 발생했다. 본인은 이 사건에 환멸을 느껴 다음 시즌 9월에 감독직을 물러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잉글랜드 클럽으로서는 처음으로 3번째 국제 대회 결승에 도달했다.
1970년대가 지나가면서 니콜슨은 축구에 점점 환멸을 느꼈고, 특히 선수 임금 인상과 만연한 훌리건 행위에 실망했다. 그는 1974년 UEFA컵 결승전에서 스퍼스가 페예노르트에게 패한 후 훌리건 행위에 경악했다.[10] 니콜슨은 1974-75 시즌의 부진한 출발과 1974년 9월 리그컵에서 미들즈브러에 4-0으로 패한 후 사임을 결정했다. 니콜슨은 나중에 그의 사임에 대해 "단순한 진실은 내가 소진되었고, 더 이상 제공할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니콜슨이 그의 후임으로 대니 블랜치플라워를 감독으로, 조니 자일스를 선수 겸 코치로 선택하고 싶어했지만, 토트넘 회장 시드니 웨일은 니콜슨이 그의 허락 없이 자일스와 블랜치플라워에게 연락한 것에 분노하면서 악의적으로 끝났다. 니콜슨은 클럽에 고문으로 남을 의향이 있었지만, 클럽은 10000GBP의 퇴직금과 함께 모든 관계를 끊고 니콜슨에게 은퇴 경기를 거부했다.[11] 1974-75 시즌 9월 미들즈브러 FC를 상대로 4-0으로 패한 후 16년간 맡았던 감독을 사임했다.
3. 4. 토트넘 감독 사임
니콜슨은 선수 은퇴 후 토트넘의 코칭 스태프에 합류하여 빠르게 승진, 1955년에 1군 코치가 되었다. 1958년 FIFA 월드컵에서는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월터 윈터보텀을 보좌했다.[5]1958년 10월 11일, 니콜슨은 지미 앤더슨의 후임으로 토트넘 감독에 임명되었다. 당시 토트넘은 1부 리그 하위 6위에 머물렀으나, 니콜슨 감독 부임 이후 클럽 역사상 최고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부임 첫 경기에서 토트넘은 에버턴을 10-4로 대파했다.[8] 이는 1959-60 시즌 FA컵에서 크루 알렉산드라를 상대로 13-2(전반 10-1)로 승리하기 전까지 클럽 최고 기록이었다.[9]
니콜슨 감독 아래 토트넘은 1960-61 시즌 리그와 FA컵에서 우승하며 20세기 첫 "더블"을 달성했다. 첫 11경기에서 승리하고 42경기에서 115골을 기록하는 압도적인 경기력이었다. 이듬해 FA컵에서 다시 우승했고, 1961–62 유러피언컵 준결승에 진출했으나 벤피카에 패했다.
1962-63 시즌, 니콜슨은 스퍼스를 이끌고 컵 위너스 컵에서 우승하며 영국 클럽 최초로 유럽 주요 트로피를 획득했다. 결승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5-1로 꺾었다.
1966-67 시즌, 니콜슨의 스퍼스는 첼시를 꺾고 7년 만에 세 번째 FA컵을 차지했다. 1970년대 초반에는 리그컵(1970-71, 1972-73)과 UEFA컵(1971-72)에서 우승했다.
1970년대 선수 임금 인상과 훌리건 행위에 환멸을 느낀 니콜슨은 1974년 UEFA컵 결승전에서 스퍼스가 페예노르트에 패하고 훌리건 폭동이 일어나자 충격을 받았다.[10] 1974-75 시즌 부진한 출발과 리그컵에서 미들즈브러에 4-0으로 패한 후 사임을 결정했다. 니콜슨은 "더 이상 제공할 것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후임으로 대니 블랜치플라워를 원했지만, 구단은 니콜슨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은퇴 경기도 거부했다.[11]
1974-75 시즌 9월, 미들즈브러 FC에게 4-0으로 패한 후 16년간 맡았던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4. 감독 이후의 삶
토트넘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니콜슨은 웨스트햄에서 1년 동안 고문 및 스카우트로 활동했다.[12] 1976년 키스 버킨쇼가 토트넘의 감독이 되자, 가장 먼저 니콜슨을 컨설턴트로 화이트 하트 레인에 복귀시켰다.[12] 그의 지식과 경험은 매우 귀중했으며, 그레이엄 로버츠, 토니 갈빈, 게리 마바트 등 여러 선수를 버킨쇼에게 추천했다. 니콜슨은 1991년 클럽 회장직을 받을 때까지 컨설턴트로 활동했다.[12]
감독에서 물러난 후 토트넘 홋스퍼 FC의 고문으로 남을 생각이었으나, 구단을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대니 블런치플라워를 후임자로 지명하여 구단과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 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에서 1년간 어드바이저를 맡았다.
1975년 대영 제국 훈장(OBE)을 받았다.
1976년 키스 버킨쇼가 토트넘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니콜슨의 복귀를 원했다. 이로 인해 컨설턴트로 구단에 복귀했다. 그레이엄 로버츠나 게리 마바트 등을 버킨쇼에게 추천하여 영입을 이끌었으며, 1984년 토트넘의 UEFA컵 우승에도 기여했다. 1991년 클럽 명예 회장이 될 때까지 컨설턴트로 구단에 재직했다.
2003년 감독으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9]
2004년 10월 23일,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5. 수상 및 영예
빌 니콜슨은 1975년에 대영 제국 훈장(OBE)을 받았다.[13] 1999년, 화이트 하트 레인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의 업적을 기려 '빌 니콜슨 웨이'로 명명되었다.[8] 2003년, 감독으로서의 영향력을 인정받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5] 토트넘 팬들은 니콜슨의 뛰어난 업적과 축구에 대한 공헌을 기리기 위해 그를 기사로 서임해 달라는 캠페인을 수년 동안 벌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6][15]
2001년 8월 8일, 구단은 니콜슨을 기리는 친선 경기를 이탈리아 클럽 ACF 피오렌티나를 상대로 치렀다. 이는 1983년 8월 21일 웨스트햄과의 경기에 이은 것이었다.[14][2]
6. 유산 및 평가
빌 니콜슨은 1975년에 대영 제국 훈장(OBE)을 받았다.[13] 1999년, 화이트 하트 레인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그의 업적을 기려 '빌 니콜슨 웨이'로 명명되었다.[8] 2003년, 감독으로서의 영향력을 인정받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5] 토트넘 팬들은 니콜슨의 뛰어난 업적과 축구에 대한 공헌을 기리기 위해 그를 기사로 서임해 달라는 캠페인을 수년 동안 벌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6][15] 빌 니콜슨은 오랜 투병 끝에 2004년 10월 23일에 사망했다.[6][8]
빌 니콜슨은 '낮은 목표를 달성하는 것보다 높은 목표를 실패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우리 스퍼스는 매우 높은 목표를 설정했고, 실패조차 영광의 메아리를 담고 있을 정도이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6] 스포츠 역사가 노먼 길러는 니콜슨과 그의 주장 대니 블랜치플라워에 대한 전기 작가인데, 이 인용문을 블랜치플라워에게서 찾는다. 길러는 "빌은 이런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퉁명스러운 요크셔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며,[17] "대니는 팀의 시인이었고 토트넘의 주장 시절 이 말을 했고 신문 칼럼에 썼습니다. 어떻게든 누군가가 그 말을 니콜슨의 입에 넣었지만, 분명히 대니가 먼저 말했습니다."라고 적었다.
7. 선수 기록
7. 1. 토트넘 홋스퍼
8. 감독 기록
빌 니콜슨은 토트넘 홋스퍼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1960-61 시즌 풋볼 리그, 1960-61 시즌, 1961-62 시즌, 1966-67 시즌 FA컵, 1970-71 시즌, 1972-73 시즌 풋볼 리그 컵, 1961 시즌, 1962 시즌, 1967 시즌 FA 채리티 실드(공동 우승), 1971-72 시즌 UEFA컵, 1962-63 시즌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그리고 1971년 앵글로-이탈리안 리그 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73-74 시즌 UEFA컵에서는 준우승을 기록했다.[1]
8. 1. 토트넘 홋스퍼
대회 | 우승 |
---|---|
풋볼 리그 1부 디비전 | 1960-61 |
FA컵 | 1960-61, 1961-62, 1966-67 |
풋볼 리그 컵 | 1970-71, 1972-73 |
FA 채리티 실드 | 1961, 1962, 1967 (공동 우승) |
UEFA컵 | 1971-72 |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 1962-63 |
앵글로-이탈리안 리그 컵 | 1971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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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tenham On This Day: Bill Nicholson Goes on Trial at Sp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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